수원화성 장안문 (Janganmun Gate in Suwon)
나혜석 (Na Hye-sŏk)
##관계와사랑 #신화와상징 #감미롭고따뜻함 #사실적묘사 #관찰자적시선
국가: 한국
소장처: 원작 유실 (현재는 엽서, 인쇄본 등으로 전해짐)
감상 포인트
빛을 머금은 색채: 흙바닥이 왜 붉은빛을 띨까요? 나무는 왜 하나의 초록색이 아닐까요? 나혜석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색이 아니라, 햇빛 아래서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인상을 포착했습니다. 땅에 반사된 햇살의 따스함,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빛의 다채로움을 자유로운 색으로 표현했죠. 이것이 바로 그녀가 유럽에서 직접 보고 배워온 인상주의 화풍의 특징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붓질: 성벽과 기와, 나무의 형태를 자세히 보세요. 매끈하고 정교한 선 대신, 짧고 빠른 붓 터치가 겹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툭툭 찍어 바른 듯한 이 붓질은 그림 전체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던 그 순간의 경쾌한 호흡과 설렘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합니다.
나만의 구도: 나혜석은 장안문의 가장 위엄 있는 정면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살짝 비껴난 자리에서, 푸른 나무들을 배경 삼아 자연스럽게 서 있는 성문의 모습을 담았죠. 이는 웅장한 기념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년 시절 추억이 깃든 친근한 '풍경'으로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보여줍니다.
시대를 담은 풍경: 이 그림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닙니다. 낡고 오래된 조선의 상징인 성문을, 당시 가장 새롭고 현대적인 서양의 화법으로 그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선언과도 같습니다. 전통적인 고향의 풍경에 자신의 새로운 지식과 시각을 덧입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1920년대 경성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죠.
'신여성' 나혜석, 고향 수원에 바치는 노래
1920년대 경성, 그녀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일본 도쿄 유학생, 남편과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온 신여성, 그리고 여성 해방을 외친 작가. 나혜석은 그야말로 시대의 아이콘이자 빛나는 별이었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은 그녀에게 수원(水原)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 곳, 바로 자신의 뿌리이자 고향입니다. 유학을 마치고 화가로서, 작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1920년대 후반, 그녀는 자신의 고향을 화폭에 담기 시작합니다. <수원화성 장안문>은 바로 그 시기의 작품입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그녀는 이미 남편과 함께 1년 8개월간의 세계 일주를 다녀온 뒤였습니다. 예술의 중심지 파리에서 그녀는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직접 보며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받았죠. 햇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색채를 포착하고,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감각과 인상을 그려내는 새로운 화법은 그녀의 예술 세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그림은 바로 그 파리의 공기를 듬뿍 마시고 돌아온 화가가 자신의 고향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 결과물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전통적인 수묵화처럼 먹의 농담으로 풍경을 그리지 않습니다. 대신, 강렬한 햇살 아래 빛나는 장안문의 순간적인 인상을 대담한 색채와 힘찬 붓질로 표현했죠. 붉은 흙길과 청록의 나무, 푸른 하늘이 어우러진 화사한 색감은 낡은 성문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고향에 대한 그녀의 자부심이자, 서양의 최신 미술을 완벽하게 체득한 엘리트 화가로서의 자신감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빛나는 삶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혼과 사회적 비난 속에서 그녀는 모든 것을 잃고 쓸쓸히 잊혀 갔습니다. 그녀의 수많은 작품들 역시 흩어지거나 사라졌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수원화성 장안문> 역시 원작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당시 발행된 엽서나 인쇄물을 통해 우리는 그저 그녀의 걸작을 희미하게 짐작할 뿐이죠.
비록 원본은 사라졌지만, 이 작은 그림 한 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시대를 너무나 앞서갔던 한 천재적인 여성이 자신의 고향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낡은 관습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 했던 그녀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말입니다. 이 그림은 나혜석이 자신의 고향, 수원에 바친 가장 빛나는 연가(戀歌)이자, 비극적인 삶 속에서도 끝내 잃지 않았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 그 자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