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개와 강아지
이암
#자연과생명#관계와사랑#감미롭고따뜻함#밝고경쾌함#사실적묘사#예민하고섬세함
국가: 한국(조선 시대)
소장처: 국립 중앙 박물관
감상 포인트
세상 가장 따스한 눈맞춤: 가장 먼저 어미 개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세요. 졸린 듯 살짝 감긴 눈이지만, 그 안에는 새끼들을 향한 무한한 애정과 평화로움이 가득합니다. 자신에게 온몸을 기댄 새끼들을 귀찮아하기는커녕, 그 체온을 온전히 느끼며 행복에 잠겨있는 듯한 표정이죠. 이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림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투박해서 더 사랑스러운: 강아지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세요. 털 한 올 한 올을 세밀하게 그린 그림은 아니죠? 오히려 뭉툭하고 어설픈 듯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어설픔'이 그림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듭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순수하고 꾸밈없는 이 표현법을 '졸박미(拙樸美)'라고 합니다.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마음이 가는 매력이죠.
텅 빈 공간이 주는 포근함: 그림의 배경은 거의 텅 비어 있습니다. 화려한 집도, 아름다운 자연도 없죠. 왜 그랬을까요? 화가는 우리의 시선이 오직 이 강아지 가족에게만 머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불필요한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나니, 어미와 새끼들이 서로에게 기대어있는 모습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텅 빈 공간이 오히려 따뜻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는 마법이죠.
성큼 다가온 구도: 그림은 마치 우리가 바로 코앞에 엎드려 강아지들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려졌습니다. 나무는 윗부분이 잘려나가 있고, 강아지들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죠. 이런 과감한 구도 덕분에 우리는 그림 밖의 관찰자가 아니라, 이 평화로운 순간을 함께하는 가족의 일원이 된 듯한 친밀감을 느끼게 됩니다.
세종대왕의 후손, 왜 강아지를 그렸을까?
이토록 소박하고 정겨운 그림을 그린 화가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놀랍게도 이 그림을 그린 이암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손자, 즉 왕족이었습니다. 높은 신분으로 얼마든지 화려하고 위엄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만, 그는 유독 강아지나 고양이, 꽃과 새처럼 작고 사랑스러운 생명들을 화폭에 담는 것을 즐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살았던 16세기는 피비린내 나는 정치 싸움, 즉 사화(士禍)가 끊이지 않던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왕족으로서 그는 인간 세상의 권력 다툼과 배신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았을 겁니다. 아마도 그는 그런 삭막한 현실에서 벗어나, 아무런 조건 없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동물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평화와 위안을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림을 다시 한번 들여다볼까요? 어미 개의 등 위에 한 마리, 턱 밑에 또 한 마리, 그리고 젖을 빠는 또 다른 한 마리. 새끼들은 제각기 가장 편안한 자세로 어미의 품을 파고들며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세상의 어떤 위협도, 어떤 근심도 없어 보입니다. 어미의 품이 곧 세상의 전부이자 가장 안전한 우주이기 때문이죠.
이암은 마치 사진을 찍듯 이 순간의 온기를 그대로 화폭에 옮겨왔습니다.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한 보드라운 털의 감촉, 짧고 뭉툭한 다리와 동그란 몸에서 느껴지는 강아지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화면 가득합니다. 어미 개의 목에 둘러진 붉은 방울 목걸이는 이들이 길에서 떠도는 개가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을 듬뿍 받는 반려견임을 보여주는 따뜻한 장치입니다.
이 그림은 단순히 귀여운 강아지 그림이 아닙니다. 이것은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던 한 왕족이 꿈꾸었던 가장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입니다. 서로를 의심하고 해치는 인간 세상과 달리, 그저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평화롭게 잠든 강아지 가족을 통해 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과연 무엇이냐고 말이죠. 50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 나른한 오후의 자장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