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초상 (Portrait of Kim Woo-young)

나혜석 (Na Hye-sŏk)

##관계와사랑 #사실적묘사 #잔잔하고고요함 #예민하고섬세함 #사회와현실

국가: 한국

소장처: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감상 포인트

  • 지식인의 얼굴을 읽다: 그림 속 남성은 그저 멍하니 앉아 있지 않습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눈빛, 굳게 다문 입술에서 냉철한 지성과 내면의 고뇌가 동시에 느껴집니다. 나혜석은 남편의 잘생긴 외모만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의 복잡한 내면까지 포착해냈습니다.

  • 과감하고 자신감 넘치는 붓질: 양복의 어깨선이나 얼굴의 윤곽선을 따라가 보세요. 망설임 없이 빠르고 힘차게 그어 내린 붓 자국이 그대로 보입니다. 이는 당시 화가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나혜석의 자신감과 예술적 열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녀는 남편을 그리는 동시에, 화가로서의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죠.

  • 아내의 시선으로 본 남편: 이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화가와 모델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아내가 남편을 그린 그림입니다. 딱딱하고 권위적인 가장의 모습이 아닌, 한 명의 동등한 인격체이자 지적인 동반자로서 남편을 바라보는 '신여성' 나혜석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시선이었죠.

행복의 정점에서 그린, 비극의 서막

1928년, 나혜석과 그녀의 남편 김우영은 경성의 모든 이들이 부러워하는 '모던 커플'이었습니다. 외교관 남편과 예술가 아내, 그들은 1년 8개월간의 긴 유럽과 미국 여행을 막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의 집은 늘 새로운 사상과 예술을 이야기하는 지식인들으로 북적였고, 나혜석은 화가로서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죠.

<김우영 초상>은 바로 이 행복의 정점에서 그려진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단순히 남편의 모습을 기록한 것을 넘어, 나혜석이 꿈꿨던 이상적인 관계와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 속 김우영은 구시대의 고루한 양반이 아닌, 깔끔한 서양식 정장을 입고 이지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신남성'입니다. 나혜석은 자신의 남편을 가장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화법으로 그려냄으로써, 자신들이 만들어가고 싶은 새로운 시대를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특히 유럽에서 직접 보고 느낀 최신 미술 사조는 그녀의 붓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습니다. 고흐의 뜨거운 색채, 마티스의 자유로운 형태처럼, 그녀는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을 넘어 인물의 내면에 숨겨진 에너지와 감정을 색채로 끄집어냈습니다. 남편의 얼굴에 과감하게 사용된 노랑, 초록, 파랑의 색조는 단순히 그림자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지성과 생명력,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나혜석 자신의 뜨거운 애정을 담은 색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그림 뒤에 숨겨진 비극적인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이 그림이 그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에서 있었던 그녀의 사랑은 부부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었고, 결국 그들은 이혼하게 됩니다. 한때는 서로의 가장 빛나는 지적 파트너이자 사랑하는 동반자였던 두 사람은, 시대의 편견과 엇갈린 운명 속에서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채 헤어지게 되죠.

그래서 이 그림을 보는 우리의 마음은 복잡해집니다. 그림 자체는 애정과 존경, 그리고 희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는 이 행복이 곧 깨어질 유리그릇과도 같았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초상화는 한때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시절의 증거이자, 다가올 비극을 알지 못했던 찰나의 행복을 박제해놓은 '행복의 화석'처럼 느껴집니다.

나혜석의 다른 많은 작품들처럼, 이 <김우영 초상>의 원작 역시 사라져 우리는 인쇄된 자료로만 그 모습을 짐작할 뿐입니다. 어쩌면 그들의 사랑이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듯, 그 사랑의 증거였던 그림 역시 운명처럼 자취를 감추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그림은 한 천재 화가의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 개인의 삶에 얽힌 사랑과 이별, 시대의 아픔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걸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