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산책

김애란 작가
#시간과기억 #내면과자아 #몽환적이고꿈같음 #감각중심표현 #예민하고섬세함 #관찰자적시선
한 가장의 몰락은 거대한 굉음이 아니라, 나직하고 어색한 발소리로 온다.
김애란의 『경기도 산책』은 세상에서 가장 길고도 짧은 거리, 바로 아버지와 딸 사이의 침묵을 담담한 걸음으로 따라가는 소설입니다. 그들의 산책은 여유로운 휴식이 아니라,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말들이 아스팔트 위를 부유하는 위태로운 여정입니다.
어느 날, 딸은 갑자기 일이 없어진 아버지와 함께 낯선 동네를 걷습니다. 평생 일터라는 갑옷을 입고 있던 아버지는, 갑자기 주어진 어색한 자유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딸은 문득 아버지의 등이 예전보다 훨씬 작아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작아진 등은 한 사람의 실직이 아니라, 한 시대가 짊어져야 했던 무게의 축소판입니다.
그들 사이의 무거운 침묵을 깨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입니다.
"경기도 인구가 몇인지 아니?"
아버지는 마치 시험문제를 내듯, 인터넷에서 찾아본 듯한 지식의 파편들을 툭툭 던집니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의 시세, 지역의 역사, 도로 계획 같은 것들.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무너져 내린 가장의 권위를 어떻게든 다시 세워보려는 필사적인 몸짓입니다. 그는 더 이상 돈을 벌어오는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없기에, 쓸모없는 지식들로나마 위태로운 자존심을 쌓아 올립니다.
딸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아버지의 말을 들어줍니다. 아버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 질문 뒤에 숨겨진 불안과 미안함, 그리고 깊은 슬픔을 읽어냅니다. 두 사람은 새로 닦인 도로와 거대한 아파트 단지 사이를 걷습니다. 모든 것이 번듯하게 세워지고 있는 신도시의 풍경은,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 산책에는 목적지가 없습니다.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입니다. 그들의 걸음은 차마 건넬 수 없는 위로이자, 서로의 상처를 애써 외면하는 안쓰러운 배려입니다. "괜찮아요"라는 말도, "힘내세요"라는 말도, 그 거대한 슬픔 앞에서는 너무나 가볍고 무력하기에, 그들은 그저 함께 걷는 것으로 모든 말을 대신합니다.
『경기도 산책』은 IMF라는 거대 담론 뒤에 가려진 한 가족의 내밀한 풍경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봅니다. 소설은 경제 위기가 한 개인의 영혼을 어떻게 침식시키고, 가족 간의 소통을 어떻게 단절시키는지를 고요하지만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결국 이 길고 긴 산책은, 서로의 아픔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나란히 걸으며 눈물을 삼키는, 이 시대 모든 아버지와 자식들의 슬픈 초상화입니다.
※ 해당 작품(경기도 산책)은 저작권 보호 대상 작품입니다. 전체 내용은 온라인 서점 또는 전자도서 플랫폼에서 구매 및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