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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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잿빛으로 얼어붙었던 시절, 한 그루의 벌거벗은 나무가 한 여자의 인생에 뿌리를 내렸다." 박완서의 『나목』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한 여성이 예술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마침내 삶의 봄을 향해 나아가는 내면의 성장기입니다.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50년대 서울. 스무 살의 '이경'은 미군 부대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의 모델 겸 점원으로 일하며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전쟁으로 두 오빠를 잃은 충격과, 그 슬픔을 이기적인 한탄으로 쏟아내는 어머니의 그늘 아래, 그녀의 감정은 메말라 버렸습니다. 그녀에게 삶이란 그저 살아남아야 하는, 아무런 색채도 없는 의무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PX 화실의 한구석에서 묵묵히 그림만 그리던 중년의 화가 '옥희도'가 그녀의 텅 빈 시선 속으로 들어옵니다. 가난하고 남루한 행색에 말수도 거의 없지만, 그의 눈은 캔버스 위에서만큼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경은 그런 그에게 이유 모를 끌림을 느낍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흔한 연애의 말이나 약속이 오가지 않습니다. 그저 함께 어두운 거리를 걷고, 침묵 속에서 서로의 고독을 어렴풋이 감지할 뿐입니다. 이경은 옥희도가 겨울의 한가운데서 앙상한 가지만 남은 고목(古木)을 집요하게 그리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그 '벌거벗은 나무(나목)'의 모습은,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옥희도는 그림에 대한 열정만을 품은 채 홀연히 그녀의 곁을 떠납니다. 이경 또한 현실에 떠밀려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평범한 중년의 삶을 살아갑니다. 옥희도와 함께했던 그 시절은 마치 흑백사진처럼, 그녀의 기억 한편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경은 우연히 옥희도의 유작 전시회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 그가 그리고 있던 바로 그 '나목'을. 이제는 한 시대의 걸작이 된 그림 앞에서, 이경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 벌거벗은 나무는 죽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혹독한 겨울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봄을 향한 생명의 의지를 안으로 단단하게 응축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옥희도는 바로 그 나무를 통해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자기 자신과, 시대의 아픔을 묵묵히 견뎌내던 사람들의 영혼을 그리고 있었음을.
그림 속 나목을 통해 자신의 지난 시간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이경. 그녀는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이고,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오빠들의 죽음을 비로소 진심으로 애도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그녀의 길고 길었던 겨울을 끝내고 마침내 마음의 봄을 맞이하게 한 것입니다.
『나목』은 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자, 예술이 상처 입은 영혼을 어떻게 구원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작품입니다. 앙상한 겨울나무가 결국 봄을 피워내듯, 가장 큰 절망 속에서도 삶의 의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묵직한 위로를 우리에게 건넵니다.
※ 해당 작품(나목)은 저작권 보호 대상 작품입니다. 전체 내용은 온라인 서점 또는 전자도서 플랫폼에서 구매 및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