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 가는 길

황석영 작가
#우정과연대 #도시와문명 #시간과기억 #허무하고공허함 #사실적묘사 #치유와위로
마음 둘 곳 없는 시대에, 고향은 지도가 아닌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섬과 같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은 삭풍이 몰아치는 1970년대의 어느 겨울, 뿌리 뽑힌 세 인물이 우연히 만나 동행하는 짧은 여정을 담담하게 그려낸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소설입니다. 그들의 발걸음이 향하는 '삼포'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사라져간 모든 것들의 상징이자 돌아갈 수 없는 마음의 고향입니다.
이야기는 공사판을 전전하는 젊은 떠돌이 '영달'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목적도 희망도 없이, 그는 그저 겨울의 추위를 피해 정처 없이 길을 나섭니다. 그 길 위에서 그는 교도소에서 막 출소하여 고향 '삼포'로 향하는 중년의 사내 '정씨'를 만납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처지를 짐작하며, 차가운 길 위에서 잠시나마 온기를 나누는 동행이 됩니다.
그들의 팍팍한 여정에 읍내 식당에서 도망친 작부 '백화'가 끼어들면서, 이 어색한 동행은 비로소 하나의 작은 공동체를 이룹니다. 세상의 쓴맛을 일찍 알아버린 백화는 퉁명스럽고 거칠게 자신을 방어하지만, 그 안에는 누구보다 따뜻한 정에 대한 갈망이 숨 쉬고 있습니다. 세 사람은 눈 쌓인 길 위에서 서로의 등을 밀어주고, 얼마 없는 돈을 털어 국밥 한 그릇을 나누어 먹으며, 마치 오래된 가족처럼 서로에게 기대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여정에서 '삼포'는 점점 더 신화적인 공간이 되어갑니다. 정씨의 기억 속 삼포는 고기잡이배가 드나들고, 감자밭이 펼쳐진 풍요롭고 인심 좋은 섬입니다. 갈 곳 없는 영달과 백화에게도 정씨가 들려주는 삼포 이야기는 언젠가 도달하고 싶은,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는 마지막 안식처처럼 느껴집니다. 그들은 삼포라는 하나의 꿈을 공유하며 추운 겨울길을 함께 걸어갑니다.
그러나 길의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냉혹한 현실의 목소리입니다.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서 들려온 소식은 그들의 마지막 희망을 산산조각 냅니다.
"거긴 이제 육지가 다 됐어. 다리가 놓이고, 큰 트럭들이 오가고, 관광호텔이 들어선다고 야단이야."
정씨가 그리던 삼포, 그들이 꿈꾸던 안식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개발의 굉음 아래, 고향은 그 본래의 모습을 잃고 낯선 땅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허탈함과 상실감 속에서, 그들의 짧은 동행도 끝을 맞이합니다. 목적지를 잃은 정씨는 영달에게 돈을 쥐어주며 백화의 차비를 보태주라 부탁하고, 세 사람은 각자의 갈 곳 없는 길을 향해 묵묵히 흩어집니다.
『삼포 가는 길』은 결국 ‘도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린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이름 모를 타인들이 만나 잠시나마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던 그 길 위의 순간이야말로 진짜 '삼포'였음을 보여줍니다. 소설은 산업화라는 거대한 파도에 밀려난 사람들의 쓸쓸한 뒷모습을 비추며,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를 먹먹하게 묻고 있습니다.
※ 해당 작품(삼포 가는 길)은 저작권 보호 대상 작품입니다. 전체 내용은 온라인 서점 또는 전자도서 플랫폼에서 구매 및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