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취유부벽정기) 유랑의 기록
김시습
#역사의무상함 #과거와현재 #인생무상 #초월적만남 #애상적이고쓸쓸함 #상징과은유
천 년의 세월이 흐른 자리에 홀로 남아, 사라져간 왕조의 그림자를 더듬는다." 『금오신화』의 마지막 이야기, 「취유부벽정기」는 화려했던 역사의 폐허 위에서 느끼는 깊은 쓸쓸함과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고려의 옛 수도, 송도에 사는 '홍생'이라는 선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와 함께 평양을 유람하던 중, 대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부벽루라는 정자에 오릅니다. 그곳은 한때 고구려의 영광이 서려 있던 곳. 그러나 이제는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쓸쓸한 강물만이 천 년의 세월을 말없이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역사의 무상함에 깊은 감회에 젖은 홍생은 정자에 앉아 시 한 수를 읊조립니다. 달빛이 교교한 깊은 밤, 시 읊는 소리에 취해 잠시 졸던 그의 앞에 홀연히 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납니다. 인간 세상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고하고 신비로운 모습의 여인.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시를 주고받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단순한 남녀의 연정이 아니었습니다. 사라져버린 옛 왕조의 흥망성쇠와 변치 않는 자연의 이치를 논하며, 역사의 유한함과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함께 탄식합니다. 홍생은 그녀의 비범한 재능과 깊은 시름에 매료됩니다.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여인은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그녀는 본래 천상의 선녀였으나, 지금은 기자(고조선을 세운 인물)의 딸인 위화 부인의 혼령으로 이 땅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홍생의 맑은 기품과 뛰어난 재주에 이끌려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죠.
하늘에 걸렸던 달이 서서히 기울고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여인은 마지막 시 한 수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집니다. 꿈에서 깨어난 듯 홀로 남겨진 홍생은 깊은 허무감과 상실감에 휩싸입니다. 그 하룻밤의 기이한 만남은 그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평양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 홍생은 결국 속세의 덧없음을 절감하고 병을 얻어 눕게 됩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집니다.
「취유부벽정기」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역사의 폐허 앞에서 한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인 고독과 무상함을 다룬 작품입니다. 화려했던 과거와 쓸쓸한 현재의 대비 속에서, 작가 김시습은 덧없이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애상을 아름답고 환상적인 필치로 그려내고 있습니다.